무모한 자전거 여행 #01 : 울산에서 서울까지 518.75km 포토 에세이(Bicycle Travel Photo Essay)

in #kr7 years ago (edited)


  "오늘 회사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했는데 자전거 당첨됐어. 필요하면 가지고 가라"

 

  2016년 말,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전화를 한 통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울산에 계시고, 저는 고향인 울산을 떠나 서울에서 오랜 기간 자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운동 삼아 탈 자전거를 찾아보고 있던 터라 잘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해를 맞아 집에 내려가서 며칠 쉬는 참에 자전거를 가지고 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서울까지 가지고 올 방법이 영 마땅치 않았습니다. 기차나 버스로 자전거를 실어오는 방법을 연구하던 도중,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타고 올라갈까?'



  중2병을 앓던 격동의 시절, 공부하기 싫을 때면 'Wish List'라는 제목을 써붙인 빈 노트에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두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노트에는 '서울 여자친구를 만나 남산 데이트 하기'처럼 시시콜콜한 것들부터 '세계일주'처럼 거창한 것들까지 다양한 희망 사항들이 적혀있었지요. 저는 그 노트의 존재를 오랜 시간 잊고 살았어요. 정작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된 이후에는 위시리스트 따위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머지는 생각하기도 귀찮았어요. 꿈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던 소년이 어느새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는 형편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겁니다.



  '자전거 타고 서울까지 여행하기'는 순위로 따지면 4위쯤 되는 리스트였어요. 저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마음먹고 시내까지 나갈 때면 보물찾기 소설의 주인공이나 된 것마냥 들떴습니다. 힘이 센 어른이 되면 서울까지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거라 생각했어요. 아버지와의 통화는 기억 저편에 버려져 있던 노트를 다시 꺼내어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저는 위시리스트를 썼던 어릴 적 그 소년에게 몹시도 부끄러워졌어요. 내가 이러려고 어른이 됐나. 


  그래서 2017년 새해에는 더 나이 들기 전에 다시 한번 위시리스트를 써보기로 했어요. 그 첫 번째 리스트가 바로 '자전거 타고 서울까지 여행하기'였습니다. 다시 소년이 된 것처럼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어요. 자전거를 마지막으로 탔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됐고, 자전거 여행도 처음이고, 체력도 저질이고, 필요한 물건이 뭔지도 몰랐지만 최소한의 준비만 갖추고 무작정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서울까지 타고 온 자전거입니다. 한눈에 봐도 몹시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전거길에서 다양한 종류의 자전거들을 마주쳤지만 이런 자전거를 타고 먼 길을 떠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자전거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여행 전날, 이 자전거를 가지고 동네 자전거 가게에 가서 사장님께 '서울까지 가려는데요'라고 했더니 아주 호탕하게 웃으시며 경주에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저는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어요) 마음씨 좋은 사장님께서는 초심자인 저를 위해 자전거용 플래쉬, 후방등, 휴대폰 거치대 등을 준비해주셨고, 바퀴의 공기압과 체인, 브레이크 상태까지 모두 체크해주셨습니다. 가장 비싼 준비물이었던 헬멧은 고향 친구 녀석에게 빌렸습니다. 



  드라마 <메이퀸>의 촬영지였던 울산 슬도에서 일출을 보고 출발했습니다. 많이 알려진 관광지는 아니지만, 프로 사진작가들이 종종 찾아올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특히 일출과 일몰을 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슬도 옆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조선소가 있어 큰 배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행 첫날은 무척 헤맸습니다. 이동하면서 지도 어플을 보는 것이 익숙지 않아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되돌아 왔고, 오르막길만 나오면 지레 겁을 먹고 자전거를 끌고 이동했습니다. 동네를 빠져나오는 데에만 반나절이 걸렸지요. 


  무엇보다도 어플이 안내하는 경로가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는 길이라 몹시 위험했습니다. ('자전거 전용' 어플이었지만 위험하든 말든 일단 자전거가 갈 수만 있으면 무조건 경로에 포함하여 안내했습니다) 공단 지역을 달리는 대형 트럭이 자전거 옆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극한의 공포였습니다. 경로를 안내하는 어플이 사람이었다면 진심을 담아 뚝배기를 내리쳤을 겁니다. 우회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은 최대한 우회했지만, 경로가 그 길 하나뿐일 때는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차를 옆에 끼고 죽을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야 했습니다. 여행 기간 내내 저를 괴롭혔던 공포였습니다. 



  위험한 도로를 지나 이렇게 매끈한 자전거 전용로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여행을 시작한 1월 1일은 한겨울이었는데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1월 중 여행했던 기간동안만큼은 날씨가 참 따뜻했습니다.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의 무모한 여행은 자전거 가게 아저씨의 말씀대로 경주에서 끝났을 겁니다. 


 


  지도의 안내를 따라 울산 외곽으로 가니 산길이 나왔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자전거를 산 구석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열 걸음마다 한 번씩 휴식을 취하며 바닥만 보고 꾸역꾸역 올라가자 관문성이 보였습니다. 관문성은 신라 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알려졌습니다. 관문성 안내비가 보인다는 것은 곧 경주에 도착한다는 의미겠지요. 오르막길만큼이나 가파른 내리막길을 신나게 달려 경주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경주에 도착했습니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쉬지 않고 달려온 까닭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숙소에서 씻고서 휴식을 취한 후 시내로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휘황찬란한 뽑기방이었습니다. 시내 여기저기에 다양한 종류의 뽑기방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기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므로 숙소는 늘 허름한 여관이나 모텔로 잡았습니다. 경주나 영천 같은 지방 소도시에서는 평균적으로 약 2~3만 원 정도면 잠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가격이 저렴했음에도 대체로 방의 상태는 훌륭했습니다. 



  경주에 온 다음 날부터는 다리와 허벅지 근육이 너무 아팠습니다. 평소에 운동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리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약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행 4일 차쯤 되자 다행히 극심한 고통은 없었습니다. 근육도 계속 쓰다보면 단련이 되는 모양입니다.    



  경주에서 영천으로 향하는 국도입니다. 빌어먹을 지도 어플은 저런 길로도 안내합니다. 도저히 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경로안내를 종료하고 지도를 보고서 우회할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빨리 목적지로 가고 싶었지만 우선 살고 싶었습니다. 


  

  우회로를 찾으면 이런 산길이 나옵니다. 가끔 이름없는 묘지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것인지 산을 타러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저는 '국토의 70%가 산지'라는 것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생길이지만 그래도 황천길보다는 낫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마냥 힘든 것만은 아닙니다.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게 된 길을 달리다 보면, 선물같이 등장하는 풍경을 혼자서만 즐길 수 있습니다. 오직 자전거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입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던 강아지도 만날 수 있습니다. 


 


  고양이도요. 


  

  소가 빠지면 섭섭합니다. 



  대구광역시 외곽으로 접어들어 4대강 자전거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온갖 위험한 길을 다 겪고 만나게 된 이 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며 스메나타의 '나의 조국' 2악장 '블타바(Vltava)'를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땅콩 항공사의 광고음악으로도 유명했던 곡입니다. 낙동강 변의 풍경은 체코의 애국자 스메나타가 만든 이 노래와 너무나도 환상적인 조화를 이룹니다. 조국의 위대한 승리를 표현한 교향곡 '나의 조국', 그리고 우리 조국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장엄한 음악과 아름다운 풍경의 조화는 평생 잊지 못할 깊은 감동을 남겼습니다. 



  자전거 여행기 1편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태해지려고 하는 시점에 자전거 여행을 떠올리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자전거 여행과 관련한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남겨주세요. (참고로 자전거에 대한 전문지식은 하나도 모릅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여정은 다음 글에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첫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갖가지 일이 있었지만, 다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괴로운 일도 있으리라. 그래도 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나타나준다. 반드시." - 요시모토 바나나, <무지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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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잘읽었습니다^^
저도 비슷한경험이 있었는데 옛날생각이 나네요

앞으로 살면서 두번 다시는 못 할 경험이었습니다ㅜ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전거 여행이라니 완전 낭만 있습니다 bbb

죽을뻔했지만 이따금씩 찾아오는 낭만 덕분에 꾹 참고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단하십니다^^ 저도 국토 종주가 위시리스트 중 하나인데 차근 차근 한번 실현해 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멋지십니다 로맨스님 자극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여유있으실 때 꼭 한번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요즘에는 자전거길이 잘 되어있어서 국도만 피한다면 안전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겁니다.

우와~!!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친구들이랑 예전에 자전거로 같이 다니던 추억이 새록새록나네욤 ! ^^ 팔로우 하고 갑니다~~>_<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하고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할 생각을 하셨다니, 그리고 실천을 하셨다니 참 대단합니다.

여행하기로 결정하고나서도 막막했었는데 일단 출발하고 보니 어떻게 해서든 하게 되더라고요. 저질 체력에 똥자전거도 할 수 있으니 다른 분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사진과 함께보니 마치 옆에서 함께 여행한 기분이 드는군요 ^^ 멋진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제로석님^^

자전거 여행.. 동생이 그렇게 국토종주를 하고 추천했지만 저는 힘듬이 무서워 도전하지 못했네요 이렇게 보니까 정말 느끼는게 많을 것 같습니다 !!

여행했던 일주일 동안만큼은 완전한 자유를 누렸어요. 가고 싶을 때 가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혼자하는 여행도 매력이 있어요. 위험한 자전거 여행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혼여' 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편은 보다 풍부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재밌는 글이고 자전거를 타고 울산에서 서울까지 가시다니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저도 한번 해보고 싶은 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중간에 소보고 놀랐네요ㅎㅎ

다큐레이터 보고 들어왔습니다 :)

반갑습니다 dyuryul님~
허접한 여행일기를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영감과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단하시네요 감히 못해볼 거 같아요.
그리고 정말 글을 잘 쓰세요. 항상 재미/감동/정보가 잘 어울어지게 쓰시는게 이쪽은 타고 나신거 같아요.
힐링 잘하고 갑니다 :)

정말 과찬이십니다 ㅜㅜ
응원과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은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와;;; 엄청나네요! 거의 뭐, 끝과 끝인데,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나옵니다;;;
무릎은 어찌 안녕하신가요?

죽다 살아났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산지가 없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한번 더 해보고싶네요^^

안 부족한 여행기 잘 봤습니다
겨울에 자전거 타다 손 다 얼었던 추억이 -_-;
그리고 확실히 자전거 전용도로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당장 주차장이 없어 갓길에 차들 잔뜩 서있는 모습보면
어렵겠죠. 우리나란 자전거 타기 너무 위험한 나라죠

날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었지만, 두꺼운 장갑은 필수 아이템이었습니다. 뭣 모르고 그냥 나갔다가 저도 손 다 얼 뻔 했습니다. 경주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장갑부터 샀었지요.

자전거 도로가 부족해서 대체로 위험한 편이었지만, 각 지자체 별로 인프라의 차이도 컸던 것 같아요. 대구나 여주같은 곳은 자전거도로가 잘 만들어져있어서 자전거로 이곳저곳 다니기 아주 편했고, 영천이나 충주같은 곳은 자전거도로가 거의 없어 고생했던 기억이 나네요.

울산 사람이라 흥미롭게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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