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회담에서는 조중연합사령부의 성립에 관한 기본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12월 3일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뚱과 회담에서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 중국과 조선의 군대는 반드시 통일적으로 지휘해야 하며 지원군이 풍부한 전투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동지가 정직을 조선동지가 부직을 맡으라고 지시했으며, 조선노동당정치국회의에서도 이에 대해 동의했다’’고 밝혔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를 사령관겸 정치위원으로 추천했고, 김일성은 김웅을 부사령관에 박일우를 부정치위원으로 추천했다. 이후의 연합명령은 펑더화이, 김웅, 박일우의 3인이 서명으로 확정하고 지원군에 대한 단독명령은 이전과 동일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연합사령부 성립후 작전 및 전선에 관련된 활동은 연합사령부 지휘로 귀속되었고, 후방의 동원, 훈련, 군정, 경비 등의 사무는 조선정부가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연합사령부는 필요할경우 후방에 요구와 제안을하게 되었다. 연합사령부는 지원군사령부와 인민군 참모부의 두조직으로 구성되었지만 한 곳에 모여 업무를 처리했다.
연합사령부의 설립은 대외비로 내부의 공문에서만 사용했다.
철로수송과 수리역시 연합사령부에 귀속되었다.
회담후 조우언라이는 ‘중조쌍방연합지휘부의 성립에 관한 중조쌍방의 협의’ 초안을 작성했다.(390, 주 93, 주은래군사활동기사, 하권, pp. 168-169)
12월 7일 북한에 돌아온 김일성은 펑더화이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쌍방은 수일내 연합사령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는 이후 다시는 군사적 지휘문제에 직접 간섭하지 않고, 중국측의 제안을 받아 들이며, 이전 인민군 제3군단의 배치를 취소하고, 가까이 있는 지원군 제9병단 송스룬의 지휘를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390, 주 94, 차이청원 방담기록; 마오쩌뚱이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2월 6일;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2월 7일, 팽덕회연보 p.545)
지상군부대와 달리 공군부대의 연합은 중공군의 참전이후에 이루어졌다.
지원군이 출동해 첫승리를 거둔후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참전을 결정했다.(391, 주98) 중공군 참전결정과정에서 끝까지 공군지원을 거부하던 스탈린은 지원군이 승리하자 공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다.
1950년 10월 29일 소련 고문은 모스크바가 “소련 공군이 안동에서 방공업무를 수행하고 중조변경을 넘나들며 작전을 수행하는데 동의했으며, 10일후 공군기지를 션양에서 안동으로 이전하는 데도 동의했다”고 조우언라이에게 통지함(391, 주99, 건국이래주은래문고, 제3책, p.427)
11월 1일 소련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의 전투에 투입.
1951년 1월 초, 자하로프는 소련공군 2개사단이 가까운 시일내 조선에 진입해 집안-강계, 안동-안주 노선을 엄호할 것이라고 통보
4월 초에는 중국공군 5개사단, 조선공군 3개사단이 참전하게 됨
소련고문의 동의하에 중국측은 통일공군지휘부의 설립을 제안함
중국과 조선의 협상을 거쳐 연합사령부 설립 원칙을 참조해 3월 ‘중도공군연합집단군사령부’가 설립됨
그러나 소련공군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음
인민군부대의 지휘계선
1951년 4월 15일 중국에서 훈련받던 부대가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인민군은 모두 7개 작전군단을 보유함. 그중 4개군단은 연합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되고, 3개군단은 인민군총사령관의 직속부대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