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의 날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심대한 충격에 휩싸인다. 소련이 스푸트니크 (동반자) 라는 이름의 위성을 쏘아 우주공간에 올렸다고 발표한 것이다. 직경 57센티미터, 무게 82.8킬로그램으로 대기에 관한 데이터를 기록하고 전송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의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리기 위해서는 그때껏 미국이 이해하고 있던 수준 그 이상의 출력을 내는 로켓이 필요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스푸트니크의 궤도보다 더 높은 곳에 도달해 있던 미국 시민들에게 가난한 빨갱이 나라 소련이 쏘아올린 스푸트니크는 심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농구공 하나 올려놓은 걸 뭘 그렇게......” 라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짐짓 딴소리를 했지만 미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소련의 로켓 기술이 미국보다 우월하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인들을 20세기 내내 유지되어 왔던 세계 최강국의 기고만장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이다.
소련의 과학자 레오니드 셰도프는 자신들의 승리에 취해 이렇게 선언한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자동차와 냉장고, 그리고 집은 사랑하지만, 자신들의 조국은 사랑하지 않는다.” 역사적인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소련보다는 미국이 더 ‘조국’으로서 사랑받았음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셰도프의 말은 미국 국민들을 무척 아프게 했다. 스푸트니크 직후 미국 과학자들이 허겁지겁 쏘아올리려고 했던 뱅가드 위성이 발사 단계에서 로켓이 박살남으로써 아픔은 절정에 달했다.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예찬이 철의 장막 설립 후 처음으로 등장했고, 미국의 치부에 서치라이트가 비춰졌다. 고등학생들에게 이렇다 할 과학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대학 교육을 받은 수학, 과학 교사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이 폭로됐고, 스푸트니크 다음 해인 1958년 의회는 ‘국가방위교육법’을 서둘러 통과시킨다. 초등과 중등학교에는 각종 기자재와 설비가 대폭 지원됐고 대학생들에게는 학비 대출을, 대학원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제공하는 가운데 교육 예산은 더블 스코어로 증가한다.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소련이 몰락한지도 20년째 된 2011년 1월, 유일한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이 스푸트니크를 언급한다. '미국의 혁신'과 '미국의 분발'을 강조하면서 ‘스푸트니크 쇼크’가 가져왔던 혁신의 물결을 본떠 미국의 ‘경쟁력’을 회복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 그러나 미국 중산층이 절정을 구가하고 있던 1950년대 말과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소득과 자산이 소수에게 집중된 가운데 중산층이 거덜나고 있는 2011년의 상황을 비춰 볼 때 영 알맹이가 없다 보였는데, 스푸트니크가 쏘아올려진지 54주년을 맞았던 해, 오바마의 연설은 일종의 불길한 예언으로 부활한다.
미국의 부귀영화를 상징하며 ‘자유로운 개인의 승리’를 찬양하는 월 스트리트에서 “우리는 탐욕스런 1퍼센트가 아닌 99퍼센트!”를 부르짖으며 부유층의 횡포와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월 가에 등장한 것이다. 스푸트니크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그 의미만큼은 결코 작지 않은 ‘쇼크’가 아닌가.
“나치 은행가들”을 규탄하며 “달러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외치는 시위대는 월 가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는 뉴욕 경찰과 맞섰다. 사태는 머지않아 종식됐지만 나는 이 시위가 스푸트니크처럼 미국 국민들의 뺨을 때려 주기를 바랐다. 세계 최강의 자존심과 외부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넘어서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 안의 적은 누구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므로
앞서 언급한 스푸트니크 당시 러시아 과학자의 말을 좀 비틀어 말한다면 “미국인들은 적을 만드는 재주는 탁월하지만 진짜 적이 누구인지는 모르기 때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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