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복과 죽음의 명단

in #zzan5 years ago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의 뒤안길

6.25의 포화가 한창 그 살기를 뿜을 무렵 나왔던 노래 "전우야 잘 자라"는 일단 명곡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본다. 군가이다보니 그 가사가 직설적이고 전투적이기는 하지만 가사와 멜로디가 쩍쩍 들러붙고 또 무엇보다 당시 한국인들 (남한인들)의 정서를 찍어내듯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가사가 감상적이라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부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을만큼 전쟁의 슬픔 또한 알맞게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의 계기를 맞아 낙동강을 건너 인민군을 들이치던 한국군의 기세를 노래하지만 그 와중에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도 있고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고 외치면서도 "달빛 아래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에 눈물이 서린다. 3절은 특히 당시 남한 사람들의 가슴을 울컥하게 했을 것 같다. ".....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물론 이 와중에도 "노들강변 언덕 위에" 누군가는 피를 뿌렸고 4절에 나오는 대로 그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 떠오르지만, 전쟁 초반 그야말로 형편없이 지리멸렬하며 서울을 3일만에 내 주고 허둥지둥 남쪽으로 쫓겨갔던 그들이 다시 한강을 보았을 때 기분이야 하늘을 다시 찾는 것 같았으리라.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했던 한국군은 해병대 1연대와 육군 17연대. 17연대는 전쟁 초반 그때는 남한 땅이었던 옹진 땅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후퇴했던 부대였고 해병 1연대는 제주도 출신으로 구성된 3기 4기 해병들이 주력을 이뤘다. 4.3 봉기의 여진이 지속되던 무렵, 제주도 청년들은 죽으나사나 대한민국에 충성을 보일 필요가 있었고 대한민국 또한 그를 기꺼이(?) 가납했던 것이다.

한국군들은 경인가도를 달리며, 연희 고지에서 피어린 격전을 벌이며 인민군을 격퇴해 나갔다. 그리고 9월 26일 해병대 2대대는 서울 시청에 나부끼던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정문에 나붙어 있던 김일성 초상화를 화형시키게 되는데 한 종군기자가 이런 말을 전한다. "중앙청을 미군이 공격 중인데 중앙청은 우리가 탈환하는 게 맞지 않겠소?"

중앙청은 미군 5연대의 구역에 속했지만 2대대는 작전 구역 합의를 넘어서서 중앙청 공격에 가담한다. "동양 최대의 석조 건물" 이자 왕년의 조선 총독부였던 중앙청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빚어졌다. 후일의 중앙청 천정에도 총탄 자국이 수십 년 남아 있었을만큼. 그 격전 와중에 박정모 소위는 두 명의 부하와 함께 태극기를 들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돌진한다. 목표는 무조건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앞이 안 보이니 도리가 없었어요. 더듬더듬 꼭대기 층에 이르러 옥탑으로 올라가려는데, 사다리 가운데가 폭격으로 끊겨 버렸어요. 혁대를 풀어 연결해 매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옥상에서 밖으로 나가는 구멍이 너무 작아서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긴 작대기를 올리게 해서 거기다 태극기를 동여매고 안에서 밖으로 내걸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서울 수복 사진이라고 알고 있는 태극기 게양 사진은 사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 수복 기념식에서 그를 재연한 것을 촬영한 것이고, 박정모 소위는 건물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태극기만 밖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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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황이 어쨌든 그 순간의 감동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포성 난무하고 검은 연기 토하는 중앙청의 맨 꼭대기에 태극기가 그 건곤감리 청홍백의 자태를 서서히 드러냈을 때 지켜보는 사람 모두 괴성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을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를 뒤로 하고 중앙청아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온 것이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았던 9월 27일 새벽 6시 10분경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국군은 서울에서 완전히 인민군을 몰아냈다. 9월 28일 서울은 공식적으로 조선 인민공화국으로부터 대한민국으로그 주인을 변경한다. 그런데 이 감격적인 서울 수복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건 나와 아주 가까운 이의 9.28과 그 언저리 사건들을 기록해 본 것이다.


“전쟁 때 난 여학교 화학 선생이었어요. 전쟁이 터지고 부랴부랴 피난짐을 싸는데 초저녁에 피난갔던 사람이 돌아와서는 이미 서울 시내에 인민군이 다 깔렸대. 짐 싸 들고 허둥지둥 길을 걷는 자기에게 한 인민군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네요. “동무들 집으로 돌아가기요” 이른바 인공(人共)의 시작이었지.

철도 공무원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이념 같은 것은 전혀 모르쇠하는 축에 끼었지만 해방되고 상당 기간 동안 철도원들이 좌익 성향이 강했고, 그쪽 친구들도 많아서 인공(人共) 세상이 왔어도 별 문제가 없었죠. 그런데 오빠가 문제였어요. 술 한 잔 먹다가 친구 따라 이름 써넣은 것이 아주 이름 높은 무슨 우익 청년단 가입원서였대. 그 명단이 고스란히 빨갱이 손에 들어가 있더라는 거예요. 동네 빨갱이 하나가 아주 작심을 하고 오빠를 잡으러 다녔어요. 오빠는 넋이 나가 도망다녔지요. 변소 똥 속에 숨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빨갱이라면 쥐잡듯이 잡았던 우익 청년단이라면 죽창에 찔려도 여러 번 찔렸을 거 아니겠어요.

하루는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선생들 다 나오라는 거야. 쭈뼛쭈뼛 선생들이 모이니까 인민군 정치위원이 의용군 지원을 위한 가두연설을 다니라는 거예요. 그때 나는 우겼지. 난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화학 선생인데 내가 그런 연설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되레 비웃을 거다...... 그 말이 통했는지 난 의용군 연설원을 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철학 전공한 교장 선생님은 피할 도리가 없었지요. 교장 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세상 바뀌면 내가 협박에 못이겨 이랬다는 증인이 돼 주시오."

8.15 기념식을 부산에서 한다 어쩐다 할 때는 인공 세상이 천년만년 갈 것 같았는데 세상은 참 우습게 바뀌더군요. 세상 바뀐다는 게 무슨 말인줄 알아요? 세상이 가벼워진다는 거야. 가벼우니까 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사람 목숨도 파리처럼 떨어진다는 거야. 미 군정 세상이 대한민국으로 바뀔 때에도 숱한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 오빠를 악귀처럼 쫓아다녔던 그 동네 빨갱이는 우리 오빠가 속했다는 우익 청년단한테 형제가 몰살당했지요. 대한민국이 인공으로 바뀐 뒤에는 위에 얘기한 바고...... 인공이 다시 대한민국으로 바뀔 때도 당연히 똑같았지요.

인천 상륙 후에 국군이 서울에 다시 들어왔을 때 놀랐던 건 우익 청년단원들이‘부역자’명단을 책으로 갖고 다닌다는 거였어요. 대체 어떻게 조사했는지 몰라도 인공 시절 누가 무슨 얘기를 했고, 어느 행사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빽빽이 적혀 있더라구요.

이제는 우리 가족 중에 아버지가 문제였어요. 인민군에 부역했다고 끌려가서 치도곤을 맞고 다음날 총살을 시킨다는 거야. 명색 우익 청년단원에 국군 (우리 오빠는 자원입대했거든) 가족이라도 빨갱이 도운 혐의는 면사(免死)가 안된대.

난 머리에 불을 인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버지 구명운동에 나섰지. 그때 서울 시내엔 시체들이 장판처럼 깔려 있었어요. 따발총 맞은 시체, 죽창에 찔린 시체, 국군한테 죽은 인민군, 우익한테 맞아죽은 빨간 완장....... 그런데 하나도 무섭지가 않아. 아버지 목숨 구하겠다는 일념에 정신이 나가도 한참을 나갔나 봐. 시체 걸리면 발로 차기도 하고 목매달려 동동거리는 시체 손으로 치우면서 가기도 했어요.

다행히 학부형으로 안면이 있던 육군 대령하고 선이 닿았어요. 대령이 직접 석방 지시 전화를 하는 걸 듣고 다시 거리로 나왔는데 그때에야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진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 시체 하나 하나가 다 일어서서 나한테 덤벼들 것 같아 너무 무서운 거야. 돌아오는데 낯익은 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있더라구요. 어디서 봤나 했는데 교장 사모님이었어. 아뿔싸 싶어 시체를 봤더니 역시 교장 선생님이더구만. 나더러 협박을 못 이겨 의용군 지원 연설한 거라고 증언해 달라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난 지금도 무서운 건 그 명단이야. 빨갱이들이 작성했던 그 명단, 그리고 우리 정부가 작성했고, 우리 국군하고 청년단이 들고 다니던 그 명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