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행을 일상의 탈출구로 여기는 순간 일상이 슬퍼진다

in #sct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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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일상의 탈출구로 여기는 순간
일상이 슬퍼진다

'어디로 도망갈까?'라는 마음으로 여행지를 고르는 나, 잠깐.

written by @hyunyoa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며 그 흔한 가족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었다. 할머니는 제주도 애월에서 나고 자라 생을 마치셨고, 엄마와 아빠도 25년 전의 신혼여행으로 방콕을 다녀온 것 외에는 일본도 가본 적 없었다. 나는 그 환경 속에서, 성인이 된다면 아르바이트비를 버는 족족 모두 여행에 쓰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스물부터 전국 팔도를 도는 내일로를 기점으로 오사카,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유럽까지 캐리어 하나 끌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이젠 돈 좀 모으라는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부모님 몰래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어차피 종일 일만 해도 집 하나 사기는 어려운 시대니까. 경험으로 견문을 넓히면 작가로서의 취업준비가 아닌가. 정신 승리하며 항공표를 끊었다. 해외여행을 갈 형편이 안 되면 속초나 강릉, 이번에는 KTX를 끊을 돈이 없어 버스로 부산까지 다녀왔다.


한 달 전, 졸업 논문과 졸업 작품을 연달아 쓰는 중 문자가 왔다.

특가 항공권 예매가 곧 시작됩니다.



방콕부터 대만까지, 가고 싶은 여행지가 추천 목록에 떠 있었다. 12월에 논문을 제출하자마자 저기로 날아가야지. 도망가야지. 탈출해야지. 행복한 고민에 잠겨 여행지를 골랐다. 특가 항공권이 뜨기 전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논문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른 저기로 날아가고 싶었다. 내일까지 마감인 자기소개서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1차 서류 합격한 일도 손에 꼽으면서,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 '여기 붙으면 1월 1일부터 출근이니까 대만 못 가는 거 아니야?' 싶었다. 급기야 퇴고도 하지 않고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작년 종일 인턴으로 번 돈을 모두 유럽여행에 쏟았다. 온갖 희롱을 당하고, 기대했던 바로 일정이 흘러가지 않았음에도 고작 일 년 지났다고 기억이 미화됐다. 여행은 낯선 이를 만날 수 있고,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고……. 나는 여행의 홍보대사가 된 듯 여행의 장점을 속으로 읊조렸다. 당연히 눈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과제를 제출하고, 한 글자라도 퇴고를 해야 합격에 가까워질 텐데.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행 느낌의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해놓자 일상이 지긋지긋하게 변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들르는 단골 카페나 맛집에 가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들어가는 앱은 항공권을 구하는 앱과 정사각형 프레임에 예쁜 풍경을 담은 여행 후기 앱이었다.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에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던 건지. 눈을 빛내며 들었던 강의도 시체처럼 가만히 멍 때리며 앉아 있으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은 이미 대만 지우펀에 가 있었다. 그런데 몸은 1교시 수업을 듣고 있자니. 정신과 육체의 괴리가 정점에 달했다. 교수님은 멍하니 앉은 내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요구했지만, 나는 도리어 물었다.


교수님, 죄송한데……. 질문을 못 들어서….


내가 이런 얼빠진 소리를 하다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소 과격하기는 하지만 정신을 한국에 오게끔 만들기 위해 아예 겨울에 어디로 떠나겠다는 계획을 삭제했다. 여행 관련 앱을 모두 지웠다. 일상에 발을 디뎌야 하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모습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날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날아가면 항상 여행 끝물에 오는 그 찝찝함에 속상했으면서. 쳇바퀴 같은 일상이라는 이제는 하나의 숙어처럼 만들어진 그 수식어에 부합하는 나의 인생에 슬퍼하는 일은 이제 그만둬야 했다. 바꿔야지.


친구와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원인에 대해 탐구했었다.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끄집었다. "오늘이 화요일인지 수요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너무 같아서 시간이 금세 가 버리는 거래." 그러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 뭐 해. 내가 딱 그런 일상을 지내는 중이었다. 그러니 낯선 일에 금세 눈이 돌아갈 수밖에. 간 적도 없는 지우펀을 상상하며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집중할 리가 있나. 오히려 일상 참 지긋지긋하다는 의견까지 더해버렸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지긋지긋한 똑같은 일상'이 내 하루를 설명하는 말로 굳어졌다.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내 존재가 무거워진다는 얘기처럼, 우선 일상에 애정이 생길만한 것들을 적어냈다. 그리고 그걸 다 지웠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 라는 생각의 전환에 도전하기. 단골 집은 미안하지만 안녕. 실패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서울 곳곳마다 온갖 맛집을 스크랩했던 메모들도 아깝지만 모두 삭제했다. 홍대에서 만나기로 했으면, 항상 방문하는 연남동의 파스타집과 그 옆 플랫화이트를 마셨던 삶의 경로들. 싹 다 무시하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딱히 갈 곳이 없어 단골 카페를 들러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깜빠뉴 같은 생소한 빵 먹어보기.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초코 파운드케이크도 맛보기. 신기하게도 성공률이 반반이었다.


'아, 역시 나는 이걸 싫어하네.'라는 마음으로 냠냠하는 때도 있다면 '오, 이거 괜찮은데?' 라며 새 취향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도 돌아 돌아가고, 한파주의보가 내린 어제는 현장 취재로 명동을 방문했지만 딱히 주제를 생각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잘 아는 명동이라 생각했지만 새로 생긴 건물과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일상 축에 들었던, 특정한 목적지로 줄곧 향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


재즈나 ASMR처럼 평소 글을 쓰며 잔잔한 노래를 들었던 것도 무시해봤다. 어느 날은 아주 EDM 빠방한 리듬의 곡을 틀고 노트북을 열었다. 물론 집중은 안 됐지만 그렇다고 아예 글을 못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나게 리듬을 타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장점을 찾았다. 일상에서 변화를 주는 것, 쉽지 않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당연히 맛이 보장된 메뉴를 고르고 싶고 재미가 보장된 콘텐츠를 보고 싶은 건 당연한 논리. 하지만 그렇게 안정을 추구하니 어느 순간 찬찬히 일상이 견고하게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자꾸 여행을 일상의 도피처, 하루의 탈출구로 여기는 과정까지 이르렀다.


매번 여행지로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상에 발 디뎌보기 프로젝트. 좋아하는 것들 싹 다 무시하고 일상을 낯설게 마주하기. [돈은 좀 아까울 때가 많지만 재미는 보장합니다.] 관광객이 한국을 신기하게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한국을 재밌게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보며!


모두가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 일상에 발 딱 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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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그렇게 변하네요. 가는 마트만 가고 걷는 길만 걷고, 친한 사람과만 대화하려 하구요. 다른 방식이 분명 있는데요. 거기에 게으름까지 협조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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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기, 바로 이 순간이
행 복입니다. ^^

오늘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글이네요.

저는 누군가 여행을 떠나자고 하면 일상을 다 던져버리고 망설임 없이 여행을 떠날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혹은 어떻게든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일상에 많이 질린 사람일수도 있겠네요.

여행이란 항상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거나, 적어도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그렇게 생각해왔기에 누구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여행을 좋아한다는 건 역시 일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데서 온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뭐 제대로 하고 있는 것도 없으면서 뭘 그리 도망치려 하는지. 글을 읽으면서 꽤나 뜨끔했네요.

그러고 나니 일상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말이 정말 와닿습니다. 결국 제가 살아가야 할 건 잠깐의 일탈이 아닌 꾸준한 일상이었던 건데 말이죠.

일상 속에서 그동안 하지 못한 일들을 부딪혀보는 게 참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하나 하나 발견하면서 일상에서의 일탈이 목적인 여행은 그만두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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