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무사의 불법 민간인 사찰과 엄윤섭씨의 죽음

in #kr6 years ago

국군기무사령부령 1조는 '군사보안, 군 방첩 및 군에 관한 첩보의 수집·처리 등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기무사를 설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직무범위는 군사보안이나 군 방첩으로 한정되고 대상도 군인과 군무원으로 제한됐지만, 기무사는 법을 넘어 민간인에 대한 정보수집과 수사를 광범위하게 해왔다. 그 대상은 주로 세상을 바꾸려던 시민사회와 민중운동 진영 인사였다.

기무사로부터 불법 사찰당한 대표적인 민간인은 엄윤섭 씨다. 기무사는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지지하는 평택역 집회에 참가했던 엄씨를 캠코더로 촬영하는 등 집요하게 사찰했다. 기무사는 쓰레기를 버리거나 담배를 피우는 모습 등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았다. 기무사는 약국을 운영하던 그의 아내가 출근해 문을 열거나 약사복을 입고 일을 하는 모습까지 세세하게 사찰했다. 그의 동료 당원들도, 금속노조 활동가들도 함께 사찰을 당했다.

공안기관에 사찰당한 피해자들은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미행하지 않을지, 자신으로 인해 함께 활동하는 동료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집 주변에 모르는 승용차가 주차돼 있으면 긴장하고, 카메라를 든 사람만 봐도 신경이 곤두선다. 엄씨도 사찰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극단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다른 이가 피해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삭제했으며 연락도 끊었다. 아는 후배가 전화해도 받지 않았으며, 계속 전화가 오면 그 후배의 집 앞을 무작정 찾아가 후배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기무사의 사찰로 자신과 가족 전체의 삶이 송두리채 파괴되는 모습을 목격한 엄씨는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사찰을 인지한 3년 후인 지난 2012년 끝내 죽음을 택했다. 두 아이와 아내를 남겨둔 외로운 죽음이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출신인 엄씨는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며 사회 변화를 꿈꿔왔다. 그는 당 활동 외에도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참여연대에 가입하는 등 보다 평등하고 공정한 대안 사회를 모색했다. 그가 힘을 쏟은 사업 중 하나는 자주평화통일 사업이었다. 그가 이 사업에 매진했던 것은 그보다 5년 전 한미FTA 반대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허세욱 열사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허씨의 죽음에 "부끄럽게 남은 제 목숨과 절망적인 대한민국의 현실이 여전히 연약한 제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며 "모든 것을 바치며 형을 떳떳하게 다시 만날 그날을 준비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법원은 그가 죽은 지 37일 만에 엄씨 등 민주노동당 당원과 사찰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인당 위자료 800만∼1500만 원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재판부는 "기무사 수사관들이 미행, 캠코더 촬영 등의 방법으로 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원고들의 사적 활동을 감시·추적하고 거주지와 출입 시각 등 사적 정보를 수집하는 등 사찰 행위를 한 것은 법령상의 직무범위를 일탈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했다.

그러나 진상 조사와 책임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재판 기록을 보면 기무사는 "진행 중인 공안 사건과 관련돼 수사 경위를 공개할 수 없으나 국정원의 조정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쳐 경찰과 공조수사를 하던 중에 촬영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후 엄씨나 민주노동당 당원 중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이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설사 혐의가 있더라도 민간 경찰에 통보를 하고, 경찰에서 다시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검사의 지휘를 받아서 수사를 하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기무사의 해명을 보면 공조 수사라는 미명 아래 불법 민간인 사찰을 수시로 벌여왔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적법하지 않은 수사는 대개 정권이나 기관 유지를 위한 공작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기무사는 사과도, 반성도 없었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날, 기무사는 사과 한마디 없이 변호사에게 전화해 손해배상 금액을 신청하라고만 했다. 불법 사찰에 가담했던 신모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했고, 당시 기무사령관이던 김종태 씨는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김씨는 선거운동 기간 "민간인을 사찰한 사실이 밝혀지면 목숨까지 걸겠다"고 발뺌했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 죽는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20대 총선에서도 당선됐던 김씨는 부인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지난해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의원직 상실 전까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던 촛불집회에 대해 "종북세력들이 조직적으로 리드했다" 등의 색깔 공세를 퍼부었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현 기무사)에 의한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1990년이다. 당시 사찰 리스트에 올랐던 이들만 1300여 명에 달했지만, 기무사의 불법은 청산되지 않았다. 1990년 이전과 이후에 어느 정도 불법 사찰을 했는지 규모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윤 이병의 폭로 뒤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고 개혁을 약속했지만, 결국 2018년 기무사는 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만 증명하고 있다.

90년대 대학에 입학해 200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기자의 지인도 알고 보니 기무사 사찰 피해자였다. 그는 기무사 사찰 논란이 불거진 뒤 페이스북에 글 하나를 올렸다.

"친구가 군대를 기무사로 배치받았는데, 우리 학교에 '조'이랑 '이'이란 사람 있냐고, 조심하라고 전해주라더라."

자기 친구가 군대에 갔는데 나와 내 동기가 학생회장으로 있던 단과대 학생회며 학교 근처 공중전화까지 싹 도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단다. 위험한 것 같으니 친구면 알려주라고 연락이 왔다며…. 당시만 해도 학생회실은 일상적 도청을 받고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와 동기 이름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때부터 겉으로 봐 선 알 수도 없는 주택가의 멀쩡한 2층 집에 보수대라고 잡혀가기까지가 무려 노무현 정권 때 겪은 일이다.

하물며 박근혜 정권은 밝혀지지 않은 극악무도한 짓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내란음모 없는 내란죄는 여전히 감옥에, 진짜 내란음모는 정권의 비호 아래 버젓이. 기무사의 기나긴 암흑의 역사를 이제는 청산할 때가 아닌지.

이번 기무사 진상조사 대상에 '계엄 문건'과 함께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불법 사찰도 들어갔다. 그러나 기무사 악행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선 시민사회와 민중운동 진영에 대한 사찰까지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그래야 정권을 넘나 들며 각종 불법과 공작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았던 기무사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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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한심한 일이 벌어졌네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책임자들을 색출해서 죄 값을 물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