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척]아재인증

in #kr6 years ago (edited)

그녀는 이대생이었다.

이른바 '과잠'(학과 점퍼) 등짝엔 'Ewha'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선명하지 못했다.

요즘 빠져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을 읽으며 출근하던 중 이대 후문 정류소에서 '딸그락' 얇고 작은 플라스틱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등짝에 'Ehwa'를 단 그녀가 헐레벌떡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저기요" 라고 불렀으나 그녀는 듣지 못했다. 일어나기는 귀찮은데.

하지만 교통카드이자 점심 식권이면서 저녁 술값이고 집으로 돌아갈 택시비일 수 있는 그 카드가 없어졌을 때 밀려드는 당혹감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엄마나 아빠한테 잔소리를 잔뜩 얻어먹고 분실신고를 하기 전에 누군가 그걸 주워 금은방에 달려가서 금붙이를 잔뜩 결제하고 튀면 어쩌나. 혹은 그 신용카드가 혼자 열심히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모은 돈이 든 통장에 연결돼 있으면 어쩌나.

귀찮음이 이런 오지랖에 무릎을 꿇고 나를 일어나게 만들기까지 그녀는 버스 문 앞에서 교통카드를 찾느라 온 몸을 뒤지고 있었다.

"저기요" 라고 한 번 더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급기야 그녀는 교통카드를 찾는 걸 포기하고 그냥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급해졌다. 사람을 두번이나 부르면서 남의 카드를 들고 버스 맨 앞까지 나갔는데 버스 문이 닫히고 출발한 뒤 멍청하게 돌아오는 내 모습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급해진 입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나갔다.

"학생!"

...

"학생"이라니. 그 말은 고등학생 무렵부터 군에 가기 전까지 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나를 부르던 말이 아니던가. 식당 이모님이나 길을 묻는 부모님 나이대 분들이 나를 "학생"이라고 불렀었다. 학생은 절대로 학생에게 학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절대로 학생이 아닌, 학생이 아닌 지 상당히 오래 된 사람들이 학생을 학생이라고 부른다. 학생이라니. 나는 어느새 학생으로 불리지 않고 학생이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된 것인가.

"하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진심이 듬뿍 담긴 인사를 뒤로 하고 자리로 돌아가며 "학생"이라는 말을 하는 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는 걸 알고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나는 착한 일을 했어. 남을 도왔다구.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녀는 감기에 걸렸는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모자를 푹 눌러 쓴 게 아침에 머리를 감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졸던 중 헐레벌떡 내리다가 카드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 버스 밖에서 카드를 건네 받으며 또 무언가를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좋은 일을 했을 뿐이다. "학생" 같은 호칭 따위는 잊어버리자.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는데, 아 참. 카드를 찍고 돌려줄 걸 그랬다는 생각에 조금 후회가 됐다. 그랬다면 좀 더 센스 있는 아재가 됐을 텐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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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제목이 생각 났습니다..
포샵으로 '아버지'를 '아재'로 바꾸고 싶네요 :-)

(오늘 이후로 시호님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ㅋ)

끝.

여기에 보팅하신 어둠속자매님이 더미움

아재의 향기를 느끼실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봐 색시~" 라 안 부르심이 다행인 듯^^

어잇쿠... 그런 날도 오겠다 싶네요

아... 아재요...

칼님이었으면 뭐라고 불렀을까!!

오야붕!

역시 시호님 글 재밌네요ㅋ 급할때 본성이 나오는거죠ㅎ

본성... ㅜㅜ 뼈맞았어요.

아... 아리가또...

스..스미마셍

오늘 버스에서 어떤 아저씨가 카드를 주워줬다 참 고마운 아저씨였다 근데 카드찍고 주머니에 꽂아주지...카드 받다가 물건을 또 떨어뜨렸다 센스는 없는 아저씨지만 고마웠다

왜 카페로 봤을까요 ㅋㅋㅋ 그나저나 거기 이쁜 학생 했으면 다 돌아봤으려나...

버스... 인데... 훨씬 급박한 상황...

이.....인..정 요 ㅎㅎㅎㅎ

인정하지마세요

게다가 Ewha일겁니다.ㅋㅋ

오옷 그렇군요!... 이제껏 몰랐다는... 고쳤습니다.

ㅋㅋㅋㅋ 학생? 급할땐 뭐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학생이라고 부른다고 다 아재는 아니죠?
시호님이야 결혼도 하셨고, 나이도 있으니 아재가 맞을것 같긴하지만...ㅋㅋ

마지막 문장만 삭제 요청드려요

ㅋㅋㅋㅋㅋㅋ

아저씨~

뼈때리지마세요

처자 라고 않부른 것만으로 위안 거리를 드립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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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십년감수 ㅋㅋㅋ

아악!!!!!!!!

솔직한 반응 고맙다 ㅆ

ㅋㅋㅋㅋㅋ 웃을 수만은 없는 공감이네요ㅋㅋ

좋은 일 하셨네요. 이 정도면 훈훈한 아재로 만족해도 될 것 같은데요 ㅎㅎㅎ

아재 인증을 꼭 해야할까요? ㅎ

EWHA 보고 EBWA이봐가 떠오르는...ㅠㅠ

학생이라니. 나는 어느새 학생으로 불리지 않고 학생이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된 것인가.

엉엉 ㅠ_ㅠ

동지여..

"학생" 같은 호칭 따위는 잊어버리자

꿈에 나오시는거 아니예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