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5월 21일 조지 월리스의 사과
미국의 1960년대는 우리들의 80년대와 유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권리와 평등과 자유를 위하여 하고많은 사람들이 투쟁했고 상처받고 사라져 가야 했으니까요. 버스의 빈 자리에 당당히 앉기 위하여, 내가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하여, 내 자식이 나같은 처지를 답습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미국의 흑인들은 투쟁에 나섰지요. 흑백분리 좌석에 반대하는 흑인들과 백인들이 미국 남부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함께 타고 여행(?)에 나섰다가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프리덤 라이딩, 즉 자유의 여행은 그 한 예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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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의 흑백 분리가 위헌이라는 브라운 판결(1954)이 있었지만 당시 미국의 남부 사람들도 한국의 재벌과 비슷하게 법원의 판결 따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뜨거운 감자 하나가 백인들의 손바닥 위에 던져집니다. 전원 백인 학생이던 앨라배마 주립 대학교에 두 명의 흑인이 입학 원서를 낸 겁니다. 당연히 대학 당국은 이를 거부했고 1963년 5월 21일 연방대법원은 흑인 두 명의 입학을 허가할 것을 앨라배마 주에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 판결을 껌 싼 종이로 여기는 백인들은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 월리스라는 사람입니다 자그마치 앨라바마 주지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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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63년 주지사 취임 연설에서 “인종분리 정책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하리라,”고 떠들던 사람입니다. 이 주지사는 연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며 스스로 학교에 나가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막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월리스 주지사를 저지하기 위해 연방군을 출동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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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이 영화속 월리스 주지사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조지 월리스가 대학 앞에 버티고 서서 연방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주지사 옆에 섰던 포레스트 검프가 흑인 학생이 떨어뜨린 수첩을 주워서 건네 주는 장면이 나오지요. (즉 포레스트 검프는 문제의 앨라배마 대학교의 미식축구 선수였던 겁니다) 연방군은 학생들을 호위하고 대학 내로 진입합니다. 흑인 학생 뒤로 총 든 미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진풍경은 한동안 계속되지요.
이른바 수구꼴통으로 놀던 월리스는 정치 초년병 시절에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지지도 받는 꽤 진보성향의 정치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거에서 KKK의 지지를 받던 라이벌에게 패하면서 홱 돌아서서 인종분리 절대 지지를 외치면서 오늘날의 우리나라 경상도를 연상시키는 남부 백인들의 마음을 휘어잡게 됩니다. 그 결과 당선된 주지사 취임식에서앞서 말한 “인종분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존재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미국 남부 백인들의 보수성도 한국의 경상도 못지않아서 그렇게 연방적인 사고를 친 이 정치인을 계속 지지합니다. 심지어 연임 금지법에 의해 월리스가 출마하지 못했을 때에는 대신 나선 부인을 당선시킬 정도였고 대선에도 출마하여 천만표 이상을 얻었으니 말 다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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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조지 월리스는 총을 맞습니다. 분노한 흑인이 그를 쏘았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범인은 “유명해지고 싶은” 백인이었어요. 그 총탄은 월리스의 척추를 갈라 놓았고 그는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됩니다. 저격, 부인의 사망, 재활과 재혼 와중에 그는 또 한 번 그의 생각을 극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자신의 인종분리 주장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인종차별 정책을 완전히 철회한다는 것이었지요. .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월리스와 대치했던 흑인 학생을 만나 사과하는 것도 그 무렵입니다. 당시의 흑인 학생 후드는 “그는 변했고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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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사과의 기술> (문예출판사, 바티스텔라 저)는 책에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절절한 사과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지사 재임 시절 자신이 지휘하던 경찰에 두들겨 맞았던 인권운동가 존 루이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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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흑인의 고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고통에 일조했음을 알고 그저 여러분에게 용서를 빌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를 유명하게 했던 1963년의 인종 분리 선언을 극적으로 폐기합니다. “그것은 잘못이었고 결코 거듭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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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유권자가 많아져서 그런 거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그의 사과와 참회를 지지한 흑인 유권자 덕택에 또 한 번 주지사가 되고 그 임기 중에는 흑인 공직자를 여럿 임명하며 그의 참회를 증명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사과를 진정으로 받아들였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월리스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았고 “철조망으로 관장을 해 버릴 자식”이라는 욕까지 들어야 했던 월리스의 법대 동기 프랭크 존슨 판사로부터는 결코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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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판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인종 차별에 반대했던 존슨 판사의 어머니의 집에는 화염병이 날아들었고 존슨의 아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존슨은 결코 월리스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일체의 대화도 거부했습니다. 누군가 월리스랑 화해를 주선하려 하자 존슨은 이렇게 대꾸했다지요. “용서받고 싶다면 하느님께 받으라고 하시오.”
이 사례를 두고 위의 책 저자는 이렇게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월리스의 사과는 변화와 화해를 상징했다. 그러나 존슨 같은 이에게는 아무 호소력이 없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릇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그 그릇의 내용물은 바뀔 수 있고 또 얼마나 채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사람이 극적으로 바뀐다고 해도 바뀌기 전의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 변화조차 과거의 소산이며 감당해야 할 개인적 유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죄 짓고 있지 않은지, 무심코 누군가의 권리의 옷자락을 밟고 서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사회가 바뀌고, 조금 나은 방향으로 진일보하는 데에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ㅋ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살아있지 않다면 사죄는 영원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