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and you'll never walk alone... (계속 걸어요, 당신 맘 속에 희망을 갖고, 당신은 절대 혼자 걷지 않을 겁니다)"
지난 27일 새벽 3시. 서울 용산역 아디다스 더 베이스 실내 풋살장은 붉은 티셔츠 차림을 한 젊은이들 700여명이 내뿜는 입김과 소란으로 가득했다. 620제곱미터 실내 풋살장은 빨간 옷을 입은 리버풀 팬들로 가득 찼다. 유에파(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시작을 45분 앞둔 시점이었다.
이하 김원상 기자
간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리버풀 공식 응원가 'You Will Never Walk Alone'이었다. 700 명은 하나가 돼 일제히 붉은 머플러를 펼쳤다. 모두는 귀청이 터지도록 응원가를 불러제꼈다.(영상) 두 주먹은 천장을 향해 불끈 쥐었다. 이곳은 서울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있는 올림피스키 스타디움이기도 했다. 적어도 모두의 마음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2017-2018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이날 새벽 3시 45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있는 올림피스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3연속 우승을 노린 디펜딩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와 11년 만에 결승전까지 올라온 '언더독' 리버풀이 맞붙었다. 리버풀 팬들에겐 지난 11년 기간 중 가장 뜨거운 열망이 끓어오른 순간이었다. 국내 리버풀 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최대 축구 펍이자 리버풀 팬들에겐 성지로 불리는 주점 '봉황당'이 챔스 결승전에 국내 리버풀 팬들이 모여 응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결승전 응원은 영국처럼 '펍'에 모여 스포츠를 함께 보고 응원하며, 또 친구도 사귀는 문화가 한국에도 싹트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좋은 예시이기도 했다.
결승전 당일 무료 입장을 허용한 연남동 봉황당
빨간 유니폼으로 가득찬 더베이스 풋볼장 광장
◈ 토요일 밤 9시부터 후끈
'봉황당'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주점이다. 봉황당은 평소에는 평범한 주점으로 운영하다가 리버풀 경기가 열릴 때마다 리버풀 경기를 대형 스크린으로 틀어준다.
리버풀이 챔스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많은 사람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자, 봉황당은 보다 넓은 공간을 물색했다. 봉황당은 서울 용산역에 있는 풋살장 '아이다스 더 베이스'를 빌렸다. 외부 기업이나 대행사한테는 손을 벌리지 않았다. 필요한 일손은 리버풀 팬 자원봉사자 힘을 빌렸다. 순수 비영리 행사였다.
이번 결승 행사에는 '조선 콥(한국에 있는 리버풀 팬)' 중 무려 4020명이 SNS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중 무작위로 선정된 700명만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6대1에 육박하는 경쟁률 때문에 행사에 당첨된 사람들은 SNS에 인증샷을 올릴 정도로 기뻐했다.
26일(토요일) 오후 9시, 경기 시작을 6시간이나 앞둔 이른 시간이었지만 참석자들은 일찌감치 줄을 서서 행사장에 입장했다.
리버풀 팬들은 널찍한 행사장 앞 광장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맥주를 마시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날 제공된 맥주는 리버풀 선수 얼굴이 프린트된 '스페셜 에디션'이었다. 이 밖에도 리버풀 선수 사인 유니폼 추첨, 축구공 발 펀치 머신으로 경품을 나눠줬다.
자정부터는 실내에 모두가 모여 서바이벌 OX 퀴즈가 열렸다. 봉황당 대표와의 인연으로 무료로 사회를 보게 된 KBS N 스포츠 소준일 캐스터가 마이크를 들었다. 진성 리버풀 덕후 8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어려운 리버풀 관련 문제들이 연달아 출제됐다. 소 캐스터는 커플 고백 타임, 탄산음료 마시고 응원가 'You Will Never Walk Alone' 부르기 등 다양한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다.
소준일 캐스터가 '가장 멀리서 온 사람'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자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했던 새미 라샤드(Samy Rashad)가 손을 들고 등장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리버풀 팬들은 그가 살라와 같은 이집트 출신이라고 밝히자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행사는 긴 시간 동안 어색함이나 지루함도 없었다. 마치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이나 직장 워크숍 같은 분위기였다.
장기자랑을 하는 참가자
탄산음료 마시고 응원가 완창에 도전한 참가자들
심지어 혼자 왔다가 친구를 만들어 함께 행사를 즐긴 참가자도 있었다. 서범서(20) 씨는 행사장 입구에서 만난 분과 동행했다. 그는 평소에도 축구 펍을 찾는다고 했다. 서 씨는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몰랐던 사람과 어렵지 않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친한 사람들끼리도 편하게 찾는 곳으로도 축구 펍은 제격이었다. 카페 사장과 알바생이 함께 우르르 온 그룹도 있었다. 알바를 하는 남궁훈(22) 씨는 "알바생 두 명만 리버풀 팬인데, 팬이 아닌 두 분을 데려왔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 '파라오'의 부상, 마네의 동점골, 카리우스의 실책 2번
새벽 3시 45분, 경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경기에 집중했다. 결승전인 만큼 사람들은 진중한 분위기로 경기에 몰입했다. 좋은 태클이나 패스가 나오면 마치 골 넣은 듯한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전반전 중반 살라가 어깨 부상으로 교체 아웃될 때는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살라와 뒤엉켜 다치게 한 라모스가 화면에 비춰질 때마다 야유가 쏟아졌다. 리버풀 에이스가 빠졌지만 응원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득점없이 팽팽했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됐다. 후반 6분 리버풀 골키퍼 카리우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선제골을 빼앗기자 실내 풋살장은 싸늘해졌다.
4분 뒤 코너킥에서 리버풀 공격수 마네가 득점을 터뜨리자 분위기는 다시 뜨거워졌다. 모든 사람이 제자리에 일어나 곁에 있는 사람과 얼싸안으며 덩실덩실 기뻐했다.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마네가 득점 한지 9분만에 레알 마드리드 베일이 믿기지 않는 바이시클킥 골이 터졌다. 카리우스 골키퍼가 또 다른 실수를 저질러 베일이 2번째 골까지 터뜨리자 현장 분위기는 크게 꺾였다. 그렇지만 리버풀 팬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경기를 끝까지 지켜봤다.
90분 종료 휘슬이 울리자 봉황당 김성민 대표는 팬들에게 마지막 응원을 제안했다. 팬들은 경기 시작 불렀던 'You Will Never Walk Alone'를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를 불렀다. 몇몇 팬들은 끝까지 남아 레알 마드리드가 시상식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봉황당 단체관람이 종료되고 밖으로 나서자 새벽 6시가 넘었다. 리버풀 팬들은 삼삼오오 집으로 떠났다. 팬들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남자친구를 따라 챔스 결승전 응원에 참여한 서은선 씨는 "모르는 사람이랑 특정 주제(리버풀)에 몰입할 수 있는 게 좋았다"라고 말했다. 서씨의 남자친구 구자현 씨는 "술집은 술만 마시거나, 축구 중계만 보는 사람으로 나뉘어있는데 축구 펍은 동시에 둘 다 하는 사람들만 있어 분위기가 (일반 술집과)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성민 대표는 "다음번에는 이번보다 더 큰 규모로 행사를 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새로운 축구 팬 문화에 다른 축구 펍까지도 동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봉황당 외에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를 위한 연남동 '굿넥', 부산 동래구에는 레알 마드리드 팬들에게 유명한 할라펍이 있다. 특정 팀을 응원하는 펍이 아닌 곳도 많다. 연희동에 위치한 라커룸, 이태원에 있는 샘라이언스 등이 축구를 즐기기 좋은 펍으로 꼽힌다. 경기도 평택에 최근 문을 연 케이비스펍, 인천 부평구에 있는 펍 오아시스도 축구 관람하기 좋은 곳이다.
머플러를 들고 응원가를 열창하는 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