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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biettivo di Papa Francesco
이 문제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원래부터 반-가톨릭의 정서가 강한 영어권 언론에서 가톨릭에 대해 말할 때는 좀 냉정하게 봐야 한다. 가령 최근 포린 폴리시에 나왔던 기나긴 칼럼을 보면 바티칸과 중국 간의 대화에 대해 매우 적대적임을 알 수 있다(참조 1).
여기서의 주장은 이렇다. 1870년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이후, 1926년 라테라노 조약(Patti lateranensi)으로 인해 교황정 관할 지역이 바티칸 시로 쪼그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이 아직도 제3의 세력인 양 스스로를 간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와중에서 바티칸은 제2차 공의회를 실시한다. 이 공의회가 중요한 이유는 매우 많은데, 외교 면에서 말하자면 딱 한 가지. "동방 정책"이다. 공의회는 동방 정책을 추진 시켰다(참조 2).
동방 정책이요? 그거 빌리 브란트의... 맞긴 맞다. 하지만 교회의 동방 정책(Ostpolitik della Chiesa)이 별도로 있다. 기사에서도 등장하는 아고스티노 카사롤리(Agostino Casaroli, 참조 3) 추기경이다. 그는 교황청 국무실(Segreteria di Stato)을 주도하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외교 관계 수립을 주도했었다. 바오로 6세부터 시작됐던 바티칸의 동방정책은 요한바오로 2세 때 절정에 달한다.
맞다. 우리의 요한 바오로 2세,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 추기경은 처음부터 반공이었고 계속 반공이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배드 캅" 역할을 맡으면서 카사롤리에게는 "굿 캅" 역할을 맡겼다. 동구권이 무너지는 이유 중에 가톨릭 교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 둘의 콤비가 나름 선순환을 일으켰을 것이다.
포린 폴리시의 기사는 좀 모순적인데, 카사롤리 추기경을 비판하면서 요한바오로 2세는 또 칭찬을 해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면모를 지닌 동방 정책이 끊긴 적이 없거늘 동방 정책은 실패했다는 결론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일 텐데...(참조 4)
내가 놀란 부분은 좀 다른 곳에 있었다. 가톨릭 교회가 원래 10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곳이거늘,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고작 70년밖에 안 걸렸기 때문이다(참조 5). 어쩌면 전례가 꽤 쌓여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에 교황이 중국과 주교 임명권을 두고 같이 후보를 추천하되, 최종 결재는 교황이 내린다는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이것만 해도 상당히 발전된 형태다.
프랑스 혁명 직후 나폴레옹과의 1801년 콩코르다(조약이라 부르지 않는다)에서 보면 일단 모든 프랑스 정부 임명 주교와 바티칸 임명 주교를 해임한 다음(!) 재임용하는 절차를 설정했다. 그 이후에도 주교 임명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10년이 흐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르헨티나의 베르골료 추기경으로 지냈던) 개인적인 이력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종교 문제에 대해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건 맞을 것이고, 포린 폴리시는 홍콩의 천르쥔(Joseph Zen) 추기경이 갑자기 프란치스코 교황의 외교를 비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비판 내용의 서한을 정식으로 교황에게 전달했다(참조 6). 이미 포린 폴리시가 제시하는 논점은 교황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의미다.
요는 이렇다. 교황청이 지금도 자신이 제3세력인양 행세한다는 관점도 있을 수는 있다. 다만 교황청이 영어권 여론에 따라 움직이는 곳은 절대로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나폴레옹의 사례에서도 보이듯, 설사 이번 달 말, 혹은 올해 말까지 협정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주교 임명 심사를 위한 대사 혹은 바티칸의 기구를 북경에 설치하지는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만과의 관계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내가 앞서 말했잖나. 바티칸은 10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고. 중국 내 서로 나뉜 교회부터 일치시키는 것이 첫 단계일 테고, 그 작업은 아마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다음은 인샬라.
참조
핵 전쟁의 위협에서 평화의 가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게다가 동유럽 국가들 중에 가톨릭 국가가 매우 많았고 말이다. 60-80년대 사람들의 핵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참조 1의 저자가 교회사를 모르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금번 교황의 결정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작업해서라고 생각한다. 베네딕토 16세의 중국에 대한 서한을 분명 알고 있을 거라 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명 선대 교황의 정책을 따르고 있다.
제2차 공의회 이후부터 바티칸이 중공(!)과 대화를 시작했으니 실제로는 40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저도 성당다니지만 첨 어려운것같아요 ㅋㅋ
요약본도 같이 써주시면 좋을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