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지인의 작업실에 갔다가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지인은 다른 분야의 사람과 작업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연신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지인의 말투와 '재밌는 작업'이라는 말에서 모종의 혐오감을 느꼈다.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타인이 혐오스럽다기보다는, 타인에게 투영된 내 모습을 직시하게 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통화를 들으며 혐오감을 느꼈던 것은 지인이 했던 말이 나 역시 수많은 사람에게 하고 다녔던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와선 '재밌는 작업'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내가 생각한 '재밌는 작업'의 포인트는 페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돈을 줄 순 없지만, 우린 예술가고 너도 그런 상황을 잘 알잖아? 그리고 우리는 적당히 예술적으로도 잘 통하는 것 같은데?'라는 말을 "재밌는 작업을 해봅시다."로 포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재밌는 작업'들은 페이는 고사하고 사비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 보니 작업 자체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페이를 받거나, 무조건 공연을 올려야 할 때는 '재밌는 작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재밌건 재미없건 그냥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이를 줄 돈이 없어, 혹은 페이를 주기 아까워 '재밌는 작업'을 가장한 적도 많았으나, 습관처럼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재밌는 작업'이라는 말을 지껄이고 다녔던 기억도 있다.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감독에게 진심도 없이 "다음 영화 때 불러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그 말을 하는 순간 정도는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다음에 작업 같이해요."라는 말을 마치 관용구처럼 하고 다녔다.
진심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작업을 함께한 경우도 드물었다. 가끔은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서로 별 의욕이 없었고, 결과적으론 질질 끌리다가 무산된 경우도 많았다. 뭐 어찌저찌 완성이 돼서 좋은 기억이 된 적도 드물지만 있긴 하다.
나 역시도 '재밌는 작업' 제안을 많이 받았었고, 돈은 크게 상관이 없으니 뭐든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작업으로 이어지면 귀찮아지곤 했다. 가끔은 돈도 안 되는데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은 적도 있었고, 잘해보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안되는 것들도 있었다.
또 하나 부끄러운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재밌는 작업'을 하려 할 때(이것은 다른 파트와 협업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 작업에 그 파트가 필요할 뿐이었지만, 협업임을 강조했다) 상대방의 스펙이나 학력을 따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 내세울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인데, 나는 "XX대학교 졸업했어."라는 말이나, "XX에서 전시했었어."라는 말로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곤 했다. (나 역시도 그런 말들로 그들에게 소개되었을 것이다)
학력도 스펙도 대단한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나 역시도 그런 것들을 내세웠지만 정작 줄 돈은 없으니 재밌는 작업 어쩌고저쩌고를 늘어놓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로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가끔은 그들에게 사비를 털어 페이를 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정작 작품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인맥 이야기를 하거나 적은 페이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게 됐다. 당연히 작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결과물은 그들의 화려한 스펙에는 한참 못 미쳤다.
'재밌는 작업'의 실체를 알아버린 후로는 절대 그런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실은 그 실체를 알기 전부터 나는 지쳐있었고, 그런 작업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다.
최근 내게 '재밌는 작업'과 관련된 일이 몇 개 생겼다. 나는 뭐가 됐든 작업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스펙 어쩌고저쩌고는 전혀 필요하지 않으니,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저번 주에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립영화를 찍으려 하는데, 내 곡을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메일 말미에는 곡비를 얼마 드려야 하냐는 말이 있었고, 시나리오가 정리되는 대로 보내주겠다는 말도 덧붙여 있었다.
그 메일을 읽고 잠깐 고민했다. '얼마를 받아야 하지?'. 그리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답장을 보냈다. 돈은 안 주셔도 되고, 제 곡을 써주셔서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시나리오는 괜찮으니 커피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간 내가 얼마나 그런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았는지. '재밌는 작업'을 한다면 적어도 곡이라도 써가야 할 것 같고, 뭐라도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스트레스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 것을 놓쳤었는지를 그 사람이 보낸 메일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몇 개의 작업이 더 있다. 빈말인진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은 내 곡을 듣고 어떤 곡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꼼꼼한 피드백을 보내주었다. 몇 번이나 곡이 좋다는 말을 해주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녹아 이 사람들 하고는 뭐라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이 모든 사람과는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그간 무슨 작업을 했는지, 우리 사이에 함께 아는 지인이 있는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걸 내려놓고 나니 마음이 정말 편했고,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좋아졌다.
"곡 쓰는 사람인데 폴 매카트니를 가장 좋아해."라는 말로 소개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나 역시도 그런 말로 소개받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즐거운, 어쩌면 '재밌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가라는 자부심 때문에 이런 걸 무시하시거나 못 쓰시는 분도 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고 ㅎㅎ
글이 진솔해서 좋네요 ㅎㅎ
그만큼 컨텐츠에 대한 보상이 열악하다는 것이겠죠.
무봉 = 열정 = 재미있는작업...
서글프네요 현실은...
열정페이, '재미있는 작업', 등등 다 결국 댓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죠.. 슬픈 현실입니다.
어린왕자가 생각나는 대목이네요.
몇 평, 얼마가 아니라 담벼락에 장미가 핀 파란 지붕 집에 살고 있어
.
미래에는 씁쓸하지 않고 행복해지는 '재밌는 작업'을 하시길 바랄게요~ :D
남들앞에서 저는 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할 만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비가 오네요. 좋아하시는 음악 많이 듣는 하루 되세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적어 놓은 글이네요..
늘 정말 재미있는 작업 하세요.
그래도 나를 찾아와서 작업 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재미 있겠습니다.
결국 그 작업을 통해 남는 물질적인 것이 없으니, 정신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인 양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겠군요 :)
그 뒤에 조금만 더 살을 붙여 보는 건 어떨까요
그의 강아지가 되고 싶어 라든지...ㅎㅎㅎ
정작 무보수나 낮은 페이로 하겠다고 툭 뱉어놓기는 했으나 정작 진짜로 일하게 되면 후회가 드는 경우가 태반이죠. 말 잘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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