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만 이렇게 필사해서 올린 것이 뜬금 없기는 했습니다. 뭔가 울림은 있었지만 정리할 깜냥이 안 되었습니다. 몇 차례 망설이다 올렸는데 @raah님의 눈에 딱 걸린 느낌입니다. 덕택에 나름 저를 스쳤던 울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융전문가도 아니고 심층심리 전문가도 아닙니다. 더구나 융 관련된 학회 한 번 참석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관심으로 관련 책을 읽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은 공인된 융학파의 의견과는 무관합니다.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말도 말하는 사람의 진의가 전달되는데 한계가 있는데 글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해서 같은 책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모양입니다. 융의 기본저작집은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저같은 문외한은 매번 그저 나름으로 새롭게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인용한 내용은 기본저작집 9권, 인간과 문화 중,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양심'이란 논문 다음으로 이어지는 '분석심리학에서의 선과 악'이란 논문의 일부입니다. 시종일관 융은 철학이나 신학이 아닌 심리학의 입장에서 환자들과 했던 작업을 근거로 경험과학자의 입장을 끈질기게 유지합니다.
융이 썼던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앞의 논문에서 융은 '양심'이란 독일어 단어가 '앎' 또는 '의식'의 특수한 경우임을 암시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 말 '앓이'는 앎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왠지 '양심'과 '앓이' 사이에 어떤 연결이 가능할 것도 같은 예감입니다.
융은 어떤 이의 꿈을 통해(물론 예로 들지 않은 다양한 꿈들을 포함해서) 도덕적 평가 작업이 의식 없이도 기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양심이 하나의 '앎'이라면 그것을 아는 주체는 무의식적 인격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도덕적 평가 작업의 전제인 도덕성은 인간의 보편적 성질일 수 있지만 그때 그때의 도덕규범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개의 사람들은 도덕규범에 의해 주어진 한도까지 그의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극소수의 경우, 두려운 의무의 알력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비길데 없는 용기와 확고부동한 믿음을 동반하는 개인적 결단에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반응은 인간 정신의 근원적인 태도이며 도덕률은 본래의 도덕적 태도가 문장의 틀로 굳어진 뒤에 생긴 수반현상입니다.
이렇게 양심은 하나의 요청이며 그것은 주체에게 그것을 관철하도록 하거나 최소한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합니다. '앓이'입니다. 양심은 의식 이전의 요청입니다. 그 답변은 올바를 수도 그릇될 수도 있습니다. 양심은 제거할 수 없는 대극에 근거한 잠재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규범의 결정에 굴복하지 않는 양심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옛날부터 신의 간여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물론 신은 인간의 발명품은 아닙니다. 언젠가 적었던 누미노제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https://steemit.com/kr/@spaceyguy/numinose-and-religio
양심의 소리가 '신의 소리'라는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심리학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야훼는 정당한 동시에 부당하며 인자하면서 잔인하고 진실된 동시에 허구적입니다. 이 대극에서 믿음을 통한 인식을 말합니다.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을 통한 인식'에서 믿음과 인식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융은 종교적으로는 화해할 수 없는 이 대극을 이해 가능한 원형의 가설로 환원할 것을 제안합니다. 원형은 대극 이전이니까요.
그럴 때 신의 소리란 견해는 원형에 특유한 확충 경향, 즉, 신화적 표현이며 그것의 근거는 원형입니다. 원형은 본질적이나 신화적 표현은 다양합니다. 원형은 종교적 표현의 정신적 전제입니다.
양심은 의식이 관습적인 것을 벗어날 때 생기는 정신현상이며 규범적이 아닌 것에 대한 원시적 두려움입니다. 이런 태도는 일부분 밖에 반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이긴 하나 윤리적임을 요구할 순 없으며 윤리적인 것의 자격은 그것이 반성될 때, 즉 의식적인 대결이 수행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앎은 '앓이'를 통해 얻어집니다.
정리하자면 양심은 의식 이전의 요청이며 인간 보편의 원형입니다. '앎'이라면 '앓이'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규범은 이미 충분한 '앓이' 이후에 그렇게 규범이 되었고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 지점까지 커다란 어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규범을 벗어난 것과 만났을 때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앓이'가 필요합니다.
야훼와 씨름을 해야했던 야곱이 생각납니다. 앓이를 통해 앓으로 나가는 통과과정으로 볼 수 있겠지요.
융의 뜻이 뭔지는 몰라도 저 역시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양심에 대한 융의 해석이 새롭네요
써놓고도 무슨 소린지...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여러번 더 읽을 듯 한데 그때마다 느낌이 달라질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