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 어려운 책, 끝내지 못한 책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독서 편식이 심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쉬운 책만 읽곤한다. 가장 만만한 것은 청소년 소설. 어휘도 쉽고, 재미도 있는데다가 300 페이지 내외라 별로 길지도 않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편협한 독서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끔은 더 길거나 어려운 책, 비소설 등에도 도전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길고 어려운 비소설 중 올해에는 꼭 읽어야지 다짐한 책들이 두어권 있는데, 바로 "총, 균, 쇠"와 "사피엔스"이다. 실은 작년에 읽자고 결심했었는데 올해로 넘어와버렸다. 그런데 어려운 비소설에 도전하기 전에 먼저 '두껍고 어려운 소설'에 도전을 하게 됐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이 책은 무려 대학생일 때 (아, 도대체 언젯적인가..) 한글로 읽었었는데, 분명 우리말로 읽는 데도 무척이나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어찌어찌 따라가며 책을 끝내긴 했지만, 결단코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언제고 시간이 되면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던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됐다.
도전에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법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영어로 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저 우연이었다. 동네 중고책 장터에 "장미의 이름"이 나와 있기에 덥썩 사버린 것이다. 일단 두툼한 책이 책꽂이에 꽂힌 채 계속 날 바라보고 있으니 안 읽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읽겠다고 덤볐다가는 중간에 덮어버릴 확률이 컸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장미의 이름"을 읽기 전에 필요한 사전 지식들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유창선 평론가가 설명한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읽기"를 본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 기본적인 시대 배경, 황제와 교황 대립관계, 각 종파의 주장 등을 알고 나니 책을 읽는 게 더 수월해졌다. 책에 수록된 수도원의 지도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펼쳐봤다. 책의 묘사를 읽으면서 지금 어디쯤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사람들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하면 책의 내용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두꺼운 책, 어려운 책, 그러나 재미있는 책
나름 준비운동을 하고 뛰어들어서인지 이번에는 영어로 읽는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중세시대의 수도원이 배경이고, 각 종파와 황제의 알력다툼이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추리물이다. 살인 예고와 살인사건이 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명석한 두뇌의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윌리엄 수도사)이 있다.
계속해서 반 발자국 차이로 뒤늦게 쫒아가는 게 아쉽지만, 그게 너무나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건이 흘러가는 맛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는 범인이 누굴까,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지만, 다 읽고나면 다른 철학적 질문들도 떠올리게 된다. 과연 진리란 무엇일까.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을까? 만에 하나 나의 믿음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내가 옳다고 믿더라도 그 믿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와 세상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믿음은 누가 확인시켜줄 수 있는 것일까?
간략한 줄거리
1327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일련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교황과 수도회의 청빈 논쟁 때문에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오게된 윌리엄 수도사는 얼결에 이 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수도회들의 토론을 앞두고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살인 사건은 묵시록의 예언 대로 하나씩 벌어지고, 그 사건을 조사하면서 윌리엄 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치게 되는데...
재미는 있지만 분명 준비운동이 필요한 책이다. 미리 배경 지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교보문고
한국어 번역판 표지. 내용과 아주 잘 어울리는 표지다.
출처: Goodreads
영어판 표지.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그림이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데, 영어판에서는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훨씬 더 크다. 아무래도 유명한 작가라서 그런 것 같다.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1.
"Then why do you want to know?
"Because learning does not consist only of knowing what we must or we can do, but also of knowing what we could do and perhaps should not do.""그럼 왜 알고 싶으신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 혹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것만이 배움은 아니기 때문이지. 배움이란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 것도 포함되니까."
2.
Fear prophets, Adso, and those prepared to die for the truth, for as a rule they make many others die with them, often before them, at times instead of them.
아드소(수련 제자의 이름), 예언자들, 그리고 진실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이들을 두려워하거라.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 수많은 다른 이들도, 때로는 자신들 대신, 종종 자신들보다 더 먼저, 죽게 만들거든.
제목: 장미의 이름
원서 제목: The Name of the Rose
저자: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특이사항: 1986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숀 코너리가 주인공인 윌리엄 수사 역할을,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그의 수련제자 역할을 맡았다.
장미의 이름은 숀 코네리만 떠오르네요. 에코 소설은 한글로 읽어도 머리가 지끈..고생하셨습니다~~
영화도 재미있다고 하는데, 예전 영화라 보기가쉽지 않네요. :)
책을 읽기 위해서 사전지식 습득차원에서 검색도 하시고.. 대단하시네요~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사전지식이 없으면 읽기 힘든 책이라서요. ^^; 그래도 준비를 하고서라도 읽고싶을 만큼 괜찮은 책입니다. 다 읽고나면 뿌듯하기도 하고요. :)